신성 로마 제국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다.
대위법음악을 완성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https://youtu.be/3ZVn9NZqyxs?si=SHF3U2Fqh6Gg8CWi
그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대의 거의 모든 음악의 영역에 손을 댔고, 거기에 작품 생활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는 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음악적 성과를 거둔 위대한 음악가다. 그야말로 희대의 천재.
바로크 음악을 총 집대성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음악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굳이 그의 음악에 대해서 음악사적인 해설을 해야 한다면 우선 바로크 음악의 종합이라는 측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여러 음악 양식들을 ‘융합’한 인물로 헨델처럼 여러 양식을 ‘조화’시킨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보인다. 동시대 독일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바흐 역시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가운데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당시 독일 궁정문화에 침투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를 다만 한 시대 음악 양식의 종합이라는 면으로서만 조명하는 것은 단편적인 견해이다. 그의 음악적 용해와 융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싹터온 것을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발견할수 있었다.
그는 엄청난 작품들을 남겼다. 성악곡에는 교회 칸타타, 세속 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마니피캇, 모테트, 가곡 등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칸타타이다. 초기의 칸타타는 북독일의 영향을 받은 모테트풍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오페라풍의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등장하고, 라이프치히 시절 초기에는 코랄 칸타타가 많이 제작됐다. 대표적인 대규모 성악곡으로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미사 b단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한편 기악곡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건반악기곡 등이 있는데 어느 분야에서든 바흐는 바로크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관현악 모음곡 제2번,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오르간 소곡집 599~644,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프랑스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이 각 분야에서 유명한 곡의 예로 꼽힌다. 그리고 말년의 ‘음악적 헌정’이나 안질로 장님이 된 탓에 완성시키지는 못한 ‘푸가의 기법’은 바흐의 대위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으로 대부분 악기를 지정하지 않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일반적으로는 특수작품으로서 별개로 분류된다.
바흐 본인은 음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쁜 마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그에게 음악은 하느님 영광의 찬미였다. 그래서 그에게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은 서로 대립하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한 같은 바탕 위에 놓여 있었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러 작곡가가 평균율을 적용해 작품을 썼지만 바흐처럼 평균율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은 없다. 바흐는 1721년, 1741년 각각 2권의 평균율 곡집을 발표했는데, 이후 음악가들은 이 곡에 엄청난 찬사를 보낸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접한 후 작곡의 기초를 다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쇼팽은 모든 곡을 외워서 칠 정도로 연습해 자신의 24개 ‘전주곡’을 바흐처럼 24개의 모든 조성으로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흐의 작품들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에 선 작품들이며, 대위법 작법의 끝판왕 격인 푸가를 포함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장르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겼지만 특히 종교음악과 오르간 분야에서는 양으로 보나 수준으로 보나 따라올 사람이 없다.[2] 바로크 말기에 대 유행했던 오페라 세리아는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오늘날 '세속 칸타타'로 불리는 대규모의 음악 드라마(Dramma per musica)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3] 바흐의 대위법은 자기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끊임없는 연구, 모방 또는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후기작품에 나타나는 대위법적인 경향도 바로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을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바흐는 단순히 대위법이나 음악 수법의 정교함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작곡가가 절대 아니다. 기법적으로 훌륭하거나 기존에 없었던 독창적인 음악 어법을 창시한 작곡가는 바흐 말고도 상당히 많다. 다른 작곡가들이 필적할 수 없는 바흐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깊이에 있다. 바흐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양 음악 분야에서 수많은 음악가가 활약했지만 단순히 듣기 좋거나 화려한 수준을 넘어 바흐처럼 진정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는 정말 정말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바흐는 시대를 초월한 올타임(all-time) 마에스트로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바흐의 음악은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상당한 노력과 연구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는 작곡가의 개성보다 정형화된 음악 문법을 바탕으로 창작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흐의 음악에 대해 수많은 해석과 연주법과 감상법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는 바흐의 음악에 내재된 깊이와 음악성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연구의 산물이다.[4] 오늘날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어려운 도전 과제이며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거기에 따라서 분류할 수 가 있다. 그러므로 오르간 연주를 위해 고용되었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들의 대부분은 오르간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교회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쾨텐에서 쓴 곡들의 대부분은 클라비어나 기악합주음악으로 교육용과 가정오락 또는 궁정오락을 위해 만들어졌다. 물론 오르간 곡이나 다른 건반악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완숙기의 작품들이 더러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되긴 했지만, 칸타타와 그 밖의 교회음악이 제일 많이 쓰여진 시기는 라이프치히 초기였다. 바흐는 일차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필사하거나 개작하는 방식을 통해 작품을 배워 나갔고 이러한 습관은 평생에 걸쳐 계속 유지되었다. 그의 곡 가운데는 토렐리, 비발디, 텔레만과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각색한 것이 많다. 이런 방식으로 바흐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작곡가들의 사용 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칼 필립 엠마뉴엘에 따르면 바흐는 건반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고 난 다음 건반악기를 직접 연주해서 그 결과를 시험해보는 전형적인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작곡 단계는 주요 테마나 주제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바흐는 생각해 낸 주제를 이미 확립된 관습적인 장르, 형식, 화성구조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어 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와 같이 텍스트가 있는 곡을 작곡할 경우에는 먼저 성악 선율을 쓰고 선율에 맞추어 가사의 강세와 의미를 적용시켰다. 바흐의 문헌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악보를 사보하거나 성부를 연주하면서 조금씩 고친다든지, 아니면 곡을 다시 연주할 때 새롭게 교정하는 식이었다. 또한 흔히 기존의 자신의 작품에 새로운 사용법을 적용하고 새 가사를 붙이거나 신선한 내용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그의 칸타타 악장 중에는 이전의 칸타타와 기악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음악을 개작한 것이 많다.